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단 편집) == [[이오시프 스탈린]] == 둘은 장제스가 1920년대에 소련에 가던 때부터 관계가 시작된다. 장제스는 스탈린 대신에 트로츠키를 만나긴 했지만 국민당과 소련의 협력 관계의 초석을 다졌고 이후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이 커넥션은 유지되었다. 친소파로 인식되던 장제스에게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스탈린은 한동안 공산당에 국민당과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장제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며 여러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상하이 쿠데타 이후 스탈린은 돌연 노선을 바꾸어 국민당 내부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고 공산당의 자체 무력을 갖추어 국민당을 장악할 것을 지시하여 왕징웨이 - 공산당 합작까지 깨고 만다. 한동안 소련과 국민당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국민당을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악취가 가시지 않은 화장실 같은 곳이라고 디스해댔으며 스탈린은 장제스를 '즙을 모두 짜낸 레몬'이라고 불렀다.[* 이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 측에서 장제스를 숙청해야한다고 주장했을 때 스탈린이 장제스는 제국주의자와 싸우는 유용한 도구이므로 아직 즙이 많이 남은 레몬과 같다고 표현한 데서 유례했다. 이 발언이 있은 후 불과 몇달 만에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자 스탈린은 장제스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바꾸었다.] 하지만 몇년 되지 않아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마오쩌둥과 소련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 처럼 스탈린과 장제스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는 1차 국공 내전과 대장정을 거치면서 마오쩌둥이 소련에서 유학한 공산주의자 들을 모조리 숙청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공산주의자 들이 중공 초창기를 이끌었고 마오쩌둥은 엄밀히 말하면 '''듣보잡'''이었다. 하지만 책 속에 파묻혀 현실을 직시못한 소련파 들은 결국 장시성에 힘들게 조성한 중화소비에트가 국민당의 5번에 걸친 초공 작전으로 완전 패망 이후 대장정을 거쳐 마오쩌둥이 이끄는 '''[[마오이즘]]'''에 밀려 소멸되었다. 소련 입장에선 마오쩌둥이 중국식 공산주의를 만들어 개인플레이를 하는 것이 탐탁치 않았고 이는 후에 중소분쟁 으로 이어진다.]이 우호 관계는 유지되었으며 국공 내전으로 장제스가 쫓겨나는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굳이 따지자면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의 편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장제스의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물론 UN상임이사국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구 5억의 인구대국과 인구 900만의 소국가운데 어떤나라를 인정해야되냐면 아무리 전자를 선택하는것이 이득이었다.] 소련은 즉각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중화민국과 연을 끊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